2007년 06월 24일
태평양전쟁과 원자폭탄 투하 - 1
엮인글: 태평양 전쟁; 원자탄과 전범 재판
평소 이 블로그에 자주 방문해주시는 어부님께서 과제를 내 주셨더군요. ^^ 그간 기말고사 기간인데다가 저 어려운 질문에 답을 하기엔 제 실력이 워낙 모자라서 다른 분들의 고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트랙백이 달리지를 않길래 미숙하나마 제가 먼저 원자탄 투하에 대해서만 글을 작성해 보기로 했습니다.
주제 자체가 워낙 논란거리인 데다가 여러 관점이 복합적으로 얽힌 주제라 단 한 번에 글을 완성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료들을 추가로 조사하고,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과정을 거쳐야 이 어려운 과제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우선 지금은 예전에 갈무리해 두었던 뉴스위크의 기사를 사용해 간단하게 제 주장을 피력해 보려고 합니다.
재작년 8월 중순 태평양전쟁 종전 60주년을 맞아 뉴스위크에 "가장 처참하고 잔혹한 전쟁"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당시 태평양전쟁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사로서, 자칫 관련된 논란에서 잊혀지기 쉬운 당시 전선의 최일선에 선 전쟁 당사자들의 분위기와 느낌을 잘 알 수 있는 해 줍니다. .
1945년 4월이면 유럽전선은 벌써 파장분위기였죠. 오늘이냐 내일이냐의 문제일 뿐, 지겨웠던 전쟁이 곧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죠. 역시 연합국의 승리는 확실했지만, 그 승리로 향하는 길에 예상되는 피해는 실로 무시무시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가미카제(神風), 카이텐(回天) 등의 자살병기와 옥쇄전략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최후의 발악 때문이었습니다.
" 가미카제(일본을 13세기 몽골의 침략에서 구해 준 ‘神風’에서 유래한 말)가 공격해 오는 순간 미 해군 통신병 제임스 보월 상병은 함교(艦橋) 위에 서 있었다. “하늘은 비행기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 가며 최대한 많은 수의 미군을 죽이려는 일념뿐인 조종사들이 모는 비행기들 말이다."
"가미카제는 대부분 순국(殉國)을 고대했다. 백발이 성성한 고나다 도시하루(82)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 45년 3월 자살공격 명령을 받은 날은 “생애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다”고 그는 당시를 돌이켰다. “등골에서 머리끝까지 흥분의 전율이 느껴졌다. 전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나의 목숨이 많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고 생각했다.” "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아버지의 깃발'이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는 저렇게 결사항전 의지로 가득 찬 일본군과의 전투가 얼마나 피로 물든 혈전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한 번 참전용사들의 회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어쩌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일련의 감동적 기념식 덕분에 미국인들은 D데이(노르망디 상륙 작전일,44년 6월 6일 )와 나치로부터의 유럽 해방에 주의를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45년 4∼6월 오키나와에선 더 피비린내 나고 더 잔인한 전투가 치러졌다. 하지만 미군 전사자 1만2000명, 일본군 전사자 20만 명을 기록한 그 전투도 그해 가을 미군이 일본 본토를 침공했을 경우 초래됐을 대규모 살육전에 비하면 국지전에 불과했다."
"오키나와에서 박격포 사수였던 미 육군 보병 돈 덴커(80)는 영화 ‘라이언 일병…’에서 톰 행크스가 대역한 중대장이 D데이 당시 계급장이 부착된 철모를 착용한 사실에 깜짝 놀랐다. 오키나와에서 “우리는 위생병의 철모에 그려진 십자가를 포함해 계급장을 모두 뗐다”고 그는 말했다. 중대장과 위생병은 적군에게 보다 구미 당기는 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오직 죽느냐 죽이느냐의, 포로조차 없는 전쟁이었다. 군목들도 M1 소총을 갖고 다니며 사용했다”고 덴커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3개월이 흘렀다. 미군은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 6월의 어느 4일 작전 동안 713 기갑 화염방사 대대는 일본인들이 숨어 있던 벙커와 동굴에 3만7000갤런의 액체 연료를 쏟아부었다. “아주 비인간적이었지만 효과가 컸다”고 덴커는 말했다. “당시는 윤리를 따지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없었다. 잽스(Japs: 일본인을 비하한 말)를 죽이고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우리의 좌우명은 ‘죽은 잽스만이 선량한 잽스’였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옥쇄전략을 수행한 일본의 인명손실 역시 무시무시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미 끝이 보이는 전쟁에서 1개 사단이 녹아내릴 정도의 손실은 미국이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막대한 손실임은 분명합니다. 거기에 상대인 일본군들의 저항의지가 약화되는 듯한 징조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구요.
"진주만 공습이 일어난 지 2년 반 뒤인 44년 여름, 전장에서 일본의 전략은 절망적이라고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베니나토가 괌에서 탱크 바닥에 누운 순간 적군이 자살 공격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정종을 마시며 ‘만세!’와 ‘미 해병대를 죽이자!’고 외쳤다. 그러곤 대검을 죽창 끝에 꽂고 돌진해 왔다. 탱크를 창으로 찌르기 위해서였다. 우린 그들 모두를 사살했다. 정말 슬펐다.”"
"고나다는 의사가 되려 했지만 전쟁 발발로 가이텐 조종사가 됐다. ... “그것은 검은색에 빛이 났으며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늘엔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순간 마음속엔 경외심이 느껴졌다. ‘그래, 바로 이거군! 내가 이걸 타고 돌진하는 거로군!”"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데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군은 본토 상륙전에 대비해 사실상 거의 모든 일본인들에 대해서 총력전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원자폭탄의 피해는 잘 알려져 있지만 미군의 소이탄을 사용한 도시 대공습의 피해는 그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지요.
"45년 가을과 46년 봄으로 예정됐던 일본 본토 침공에 대비해 양측 모두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했다. 미 육군 항공단장 커티스 르메이 대장은 5000대의 B29 폭격기 출격을 준비시켰다. 그의 ‘소각 임무’로 일본 도시 지역의 약 3분의 1이 불탔고 거의 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 쪽도 50만 명의 미군 침략자들을 막기 위해 적어도 6000대의 가미카제 비행기와 235만 명의 정규군, 게다가 약 3000만 명의 민병대를 동원했다. 7월 21일 미 제5 공군의 정보 회보는 이렇게 선언했다.“일본의 전체 인구가 공식 공격 목표다… 일본에 민간인은 없다.”"
터널의 끝은 보이는데 길은 갈수록 험해지고 마침내 터널 끝에는 암벽이 도사리고 있는 걸 확인했을 때, 다이너마이트로 암벽을 무너뜨리겠다는 선택은, 최소한 제가 보기에는 정당해 보입니다.
원폭 투하와 종전이 당시 미군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바라보죠.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원폭을 사용하지 말아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쟁터에 가보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그들은 총격을 받거나 80~85%의 사상자가 나리라고 판단되는 상황에 처해 보지 않은 자들이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키스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8월 15일 일본 항복이 발표되자 “우리는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베니나토는 말했다. 중기 판매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그는 루이지애나주에 산다. “맥주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몰랐지만 우리는 엄청나게 마셔 댔다.”"
"덴커는 필리핀에서 다시 싸울 태세를 갖추던 중 종전을 맞았다. 그는 9개월의 전투에서 중대원 187명 중 부상 없이 살아남은 7명 가운데 한 명이다(50명이 전사했다). 그와 동료들의 반응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뿐이었다”고 덴커는 말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환경공학 기사가 됐다. “내게 종전은 사형 선고 철회나 마찬가지였다.” "
최소한, 미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당시 전쟁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신속한 종전을 위한 원자폭탄 투하 결정은 충분히 정당했습니다.
추후 관련된 자료를 더 조사해서 보강하겠습니다.
평소 이 블로그에 자주 방문해주시는 어부님께서 과제를 내 주셨더군요. ^^ 그간 기말고사 기간인데다가 저 어려운 질문에 답을 하기엔 제 실력이 워낙 모자라서 다른 분들의 고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트랙백이 달리지를 않길래 미숙하나마 제가 먼저 원자탄 투하에 대해서만 글을 작성해 보기로 했습니다.
주제 자체가 워낙 논란거리인 데다가 여러 관점이 복합적으로 얽힌 주제라 단 한 번에 글을 완성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료들을 추가로 조사하고,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과정을 거쳐야 이 어려운 과제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우선 지금은 예전에 갈무리해 두었던 뉴스위크의 기사를 사용해 간단하게 제 주장을 피력해 보려고 합니다.
재작년 8월 중순 태평양전쟁 종전 60주년을 맞아 뉴스위크에 "가장 처참하고 잔혹한 전쟁"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당시 태평양전쟁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사로서, 자칫 관련된 논란에서 잊혀지기 쉬운 당시 전선의 최일선에 선 전쟁 당사자들의 분위기와 느낌을 잘 알 수 있는 해 줍니다. .
1945년 4월이면 유럽전선은 벌써 파장분위기였죠. 오늘이냐 내일이냐의 문제일 뿐, 지겨웠던 전쟁이 곧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죠. 역시 연합국의 승리는 확실했지만, 그 승리로 향하는 길에 예상되는 피해는 실로 무시무시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가미카제(神風), 카이텐(回天) 등의 자살병기와 옥쇄전략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최후의 발악 때문이었습니다.
" 가미카제(일본을 13세기 몽골의 침략에서 구해 준 ‘神風’에서 유래한 말)가 공격해 오는 순간 미 해군 통신병 제임스 보월 상병은 함교(艦橋) 위에 서 있었다. “하늘은 비행기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 가며 최대한 많은 수의 미군을 죽이려는 일념뿐인 조종사들이 모는 비행기들 말이다."
"가미카제는 대부분 순국(殉國)을 고대했다. 백발이 성성한 고나다 도시하루(82)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 45년 3월 자살공격 명령을 받은 날은 “생애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다”고 그는 당시를 돌이켰다. “등골에서 머리끝까지 흥분의 전율이 느껴졌다. 전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나의 목숨이 많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고 생각했다.” "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아버지의 깃발'이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는 저렇게 결사항전 의지로 가득 찬 일본군과의 전투가 얼마나 피로 물든 혈전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한 번 참전용사들의 회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어쩌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일련의 감동적 기념식 덕분에 미국인들은 D데이(노르망디 상륙 작전일,
"오키나와에서 박격포 사수였던 미 육군 보병 돈 덴커(80)는 영화 ‘라이언 일병…’에서 톰 행크스가 대역한 중대장이 D데이 당시 계급장이 부착된 철모를 착용한 사실에 깜짝 놀랐다. 오키나와에서 “우리는 위생병의 철모에 그려진 십자가를 포함해 계급장을 모두 뗐다”고 그는 말했다. 중대장과 위생병은 적군에게 보다 구미 당기는 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오직 죽느냐 죽이느냐의, 포로조차 없는 전쟁이었다. 군목들도 M1 소총을 갖고 다니며 사용했다”고 덴커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3개월이 흘렀다. 미군은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 6월의 어느 4일 작전 동안 713 기갑 화염방사 대대는 일본인들이 숨어 있던 벙커와 동굴에 3만7000갤런의 액체 연료를 쏟아부었다. “아주 비인간적이었지만 효과가 컸다”고 덴커는 말했다. “당시는 윤리를 따지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없었다. 잽스(Japs: 일본인을 비하한 말)를 죽이고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우리의 좌우명은 ‘죽은 잽스만이 선량한 잽스’였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옥쇄전략을 수행한 일본의 인명손실 역시 무시무시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미 끝이 보이는 전쟁에서 1개 사단이 녹아내릴 정도의 손실은 미국이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막대한 손실임은 분명합니다. 거기에 상대인 일본군들의 저항의지가 약화되는 듯한 징조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구요.
"진주만 공습이 일어난 지 2년 반 뒤인 44년 여름, 전장에서 일본의 전략은 절망적이라고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베니나토가 괌에서 탱크 바닥에 누운 순간 적군이 자살 공격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정종을 마시며 ‘만세!’와 ‘미 해병대를 죽이자!’고 외쳤다. 그러곤 대검을 죽창 끝에 꽂고 돌진해 왔다. 탱크를 창으로 찌르기 위해서였다. 우린 그들 모두를 사살했다. 정말 슬펐다.”"
"고나다는 의사가 되려 했지만 전쟁 발발로 가이텐 조종사가 됐다. ... “그것은 검은색에 빛이 났으며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늘엔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순간 마음속엔 경외심이 느껴졌다. ‘그래, 바로 이거군! 내가 이걸 타고 돌진하는 거로군!”"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데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군은 본토 상륙전에 대비해 사실상 거의 모든 일본인들에 대해서 총력전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원자폭탄의 피해는 잘 알려져 있지만 미군의 소이탄을 사용한 도시 대공습의 피해는 그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지요.
"45년 가을과 46년 봄으로 예정됐던 일본 본토 침공에 대비해 양측 모두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했다. 미 육군 항공단장 커티스 르메이 대장은 5000대의 B29 폭격기 출격을 준비시켰다. 그의 ‘소각 임무’로 일본 도시 지역의 약 3분의 1이 불탔고 거의 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 쪽도 50만 명의 미군 침략자들을 막기 위해 적어도 6000대의 가미카제 비행기와 235만 명의 정규군, 게다가 약 3000만 명의 민병대를 동원했다. 7월 21일 미 제5 공군의 정보 회보는 이렇게 선언했다.“일본의 전체 인구가 공식 공격 목표다… 일본에 민간인은 없다.”"
터널의 끝은 보이는데 길은 갈수록 험해지고 마침내 터널 끝에는 암벽이 도사리고 있는 걸 확인했을 때, 다이너마이트로 암벽을 무너뜨리겠다는 선택은, 최소한 제가 보기에는 정당해 보입니다.
원폭 투하와 종전이 당시 미군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바라보죠.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원폭을 사용하지 말아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쟁터에 가보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그들은 총격을 받거나 80~85%의 사상자가 나리라고 판단되는 상황에 처해 보지 않은 자들이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키스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8월 15일 일본 항복이 발표되자 “우리는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베니나토는 말했다. 중기 판매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그는 루이지애나주에 산다. “맥주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몰랐지만 우리는 엄청나게 마셔 댔다.”"
"덴커는 필리핀에서 다시 싸울 태세를 갖추던 중 종전을 맞았다. 그는 9개월의 전투에서 중대원 187명 중 부상 없이 살아남은 7명 가운데 한 명이다(50명이 전사했다). 그와 동료들의 반응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뿐이었다”고 덴커는 말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환경공학 기사가 됐다. “내게 종전은 사형 선고 철회나 마찬가지였다.” "
최소한, 미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당시 전쟁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신속한 종전을 위한 원자폭탄 투하 결정은 충분히 정당했습니다.
추후 관련된 자료를 더 조사해서 보강하겠습니다.
# by | 2007/06/24 22:36 | 역사와 한국 | 트랙백(1)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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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고강한 위력은 정말로 미국에게는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무기였으리란 생각이 들더군요.
...거기다, 일본 측의 사무라이즘이 가미된 군국주의의 광기는 그걸 사용함에 있어
한결 거리낌없게 만들어준 셈이고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