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신문에 실린 회고담을 통해 전쟁 말기 태평양전쟁의 지상전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이제 실제 전장에서의 일본군과 미군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죠.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발행의 '세계전쟁사'와 위키의 자료를 주로 참고했고, 오키나와 전투 부분은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
1. 이오지마 전투 (1945.2.19~3.16)

이오지마에는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 휘하의 제109사단을 기간으로 하는 일본군 2만 2천명이 투입돼 있었고, 이에 대해 미군은 제3, 제4, 제5 해병사단으로 구성된 슈미트 소장의 제5해병군단이 점령 임무를 띄고 있었습니다. 총 투입된 병력은 11만명.4주일간의 혈전에서 2만 2천명의 일본군은 포로 216명(100명 중 1명. 대략 2개 소대당 1명)을 제외하고 전원 사망했습니다. 위키에 의하면 확인된 전사자는 2만 703명이군요. 부상자? 부상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미군의 전사자는 무려 6,825명이었고 그 외 부상 후 사망자가 1,401명, 부상자가 19,189명, 실종자 494명으로 총 인명손실은 일본군의 규모를 초과하는 2만 7천 909명입니다.
부상자가 하나도 없다는 데서 일본군의 저항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오지마의 일본군은 단순한 야습 및 자살돌격(반자이 어택 -_-)으로 일관했던 기존의 일본군과 달리 매우 지열이 높고 유황성분이 많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섬 전체에 지하호로 방호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미국군을 매우 괴롭혔지요. '아버지의 깃발' 전반 부분에 일본군의 전술이나 치열한 저항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전멸할 때까지' 저항하는 일본군을 처리해야만 했던 미국군의 인명 손실도 굉장히 막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교가 적합할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쟁 초기 미국이 삽질을 거듭했던 시기의 대표적 패전이었던 카세린 패스 전투에서 미군의 손실이 3만명 중 1만명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군인들 뿐만 아니라 정치가들도 1945년 시점에서 대략 25%의 손실을 감내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2. 오키나와 전투 (1945.4.1~6.21)

오키나와는 길이가 65마일, 폭이 2~18마일, 면적은 485제곱마일입니다. 전쟁 당시 오키나와에는 우시지마 중장의 제3군 7만 7천명의 병력과 2만 명으로 추산되는 의용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공격하는 미군은 버크너 중장의 제10군 예하 육군 24군단(4개 사단)과 제3해병군단(3개 사단)으로 전투요원 17만 2천명, 지원부대 11만 5천명이었습니다.
미군은 3개월간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 1만 2천 513명, 부상 3만 8천 916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가미카제 등 특공작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투함 손실도 격심해지기 시작했지요. 야마토의 해상 특공은 아까운 장병들의 목숨만 잃게 만든 뻘짓으로 끝났지만, 4월 6일의 가미카제로 구축함 3척과 LST 1척, 탄약함(아마 LKA가 아닐지) 2척이 격침되는 등, 4월 1일부터 7월 29일까지 미해군은 각종 상륙함/상륙정 17척, 구축함 14척이 격침됐고 5천 명 이상의 해군 장병들이 전사함으로써 진주만을 포함한 단일전투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군의 피해는 실로 형언하기도 어려울 정도지요. 전사 6만 6천, 부상 1만 7천,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소 7만에서 최대 16만 명에 이르는 죄없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본토도 아닌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상륙에만도 수 만명 단위의 인명손실을 감수해야 했는데 규슈 상륙작전인 올림픽 작전, 또는 관동 상륙작전인 코로넷 작전 등이 결행됐을 경우 예상되는 미군의 피해는 얼마나 됐을까요? 당시 일본은 결호작전(決號作戰)에 의해 지상결전 계획을 세워 당시 지상병력은 2백만 명, 각종 항공기는 8천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은 일본 본토 공략을 위해 적어도 1백만 명의 병력 손실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일본군, 일본인들이 전장에서만 죽어나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일본인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웠던것은 커티스 르메이가 지휘했던 B-29의 소이탄 세례였을 것입니다.
3. 전략폭격 (참고: 행인1님- 장군님은 폭격 매니아?)

이러한 대성공에 고무받은 르메이는 공세를 더해가기 시작해 6월 중순까지 나고야, 고베, 오사카, 요코하마, 가와사키 등 5대 공업중심지가 폐허가 되고 26만 명이 사망했으며, 200만채의 건물이 불에 타 900만~1천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7월까지 일본의 60개 대도시의 지표면 60%가 완전히 불에 탔다고 합니다.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참상은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에 잘 표현돼 있지요.
일본인들에게 닥친 재앙은 이것 뿐이었느냐? 당장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운 '굶주림'이 일본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아(飢餓)작전'이라는 계획 하에 일본인들을 굶겨죽이기 위한 기뢰부설 작전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4. 기뢰부설작전 (Operation Starvation)
화려한 전함끼리의 포격전이나 항공모함끼리의 공중전에 밀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잠수함부대는 개전 초부터 일본군의 상선대를 목표로 통상파괴전을 수행, 1944년 말에는 일본의 해상 운송이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미군은 1945년, 잠수함에 의한 통상파괴전뿐만 아니라 항구 및 수로에 대한 기뢰부설을 통해 일본의 선박들이 바다로 나오지도 못하게 만들려고 하지요.
이 작전을 수행한 것은 역시나 커티스 르메이의 B-29들이었습니다. 313폭격비행단의 160대의 B-29를 동원, 1945년 3월 27일부터 기뢰부설이 시작됐지요. 이로 인해 일본의 거의 모든 주요 항구와 해협은 봉쇄됐습니다. 총 1만 2천 135발의 기뢰가 부설돼 670척, 125만톤(총톤인지 배수톤인지는 불분명)의 선박이 침몰됐습니다.
이 작전으로 인해 한반도와 일본과의 연결도 끊기고 일본 본토는 심각할 정도의 기아에 시달리게 됐다고 합니다. 전후 일본의 기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만화 "레인보우 2사 6방의 7인"에 잘 표현돼 있지요.
PS.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잠수함부대가 수행한 통상파괴전에 대해서는 한국해양전략연구소의 "태평양잠수함전"에 잘 소개돼 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보고 구하려고 했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미군뿐만 아니라 일본군, 일본인들도 전쟁이 끝날 무렵 엄청난 인명손실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상되는 손실을 감안해 볼 때, 핵폭탄 투하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의 결론은 사족일 뿐인 것 같네요.




덧글
파파울프 2007/06/29 18:52 # 답글
야마토의 뻘짓 특공이라는 말 심히 공감합니다. 확실히사람이 코너에 몰리면 이성적인 면이 결여 되는 것 같습니다. 야마토가 아무 이상없이 목적지까지 가서 그대로 쳐박아 요새로 쓸 확률은 도착했다는 결과만 보면 별 문제 없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의 여러가지 변수들은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지원할 항공세력도 없는데 재수 좋으면 성공할 수 있다 정도의 생각이었을까요?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변화구도 안쪽도 바깥쪽도 모조리 공략당한 투수가 오직 멀쩡한 곳은 <정가운데 직구다>라는 것이 대단한 발견인것 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전쟁 초기만 해도 그정도 뻘짓은 하지 않았던것 같은데... 그러고 보면 일본군도 지구력이 참 없어요... 사쿠라처럼... 임란이나 태평양이나...
어부 2007/06/30 20:17 # 답글
사실은 제가 써야 할 글인데 대신 써 주셨군요. ^^딱 하나 언급하고 싶은 점이, 이오지마의 구리바야시 중장은 쓰신 것처럼 옥쇄 작전을 실행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더 빨리 죽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적에게 최대의 피해를 입히는 방법이 아니다. 더 이상 만세 돌격을 하지 않는다.
만세 공격(옥쇄 돌격)을 했다면 미군이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내지 않았겠죠.
BigTrain 2007/06/30 23:04 # 답글
파파울프님// 관련된 글들을 보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광기에 휩싸여 자살돌격을 감행한 것 같더군요. 전시의 광기나 집단주의는 정말 무섭습니다. 요즘은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더 그렇구요. -_-;어부님//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핵폭탄 투하는 적어도 "미국군의 인명 손실을 줄인다!"는 면에서 충분히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쟁을 빨리 종식시킴으로써 일본인들의 피해도 사실상 더 줄여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결국 결과적으로는 핵폭탄 투하의 효과가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듯 한데, 문제는 핵폭탄 투하의 결정이 토론과 손익계산을 거친 합리적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20억불이나 들인 값비싼 무기를 안 쓸 순 없다!"는 논리 하에 결정된 비이성적 결정이었는지가 관건이 될 듯 합니다. 핵무기로 인한 피해가 재래식 폭격으로 인한 피해보다 더 윤리적으로 나쁜가, 라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을 듯 한데, 이 문제는 제가 다루기에는 무리인 것 같구요.
아, 그리고 '반자이 어택'으로 오해될 수 있는 옥쇄전략이라는 표현은 수정해야겠군요. '세계전쟁사'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쓰다보니... ^^;
스카이호크 2007/07/01 00:14 # 삭제 답글
마키아벨리가 좋아할 만한 내용이군요.ㅎ저라도 다 이긴 전쟁 저렇게 질질 늘어지는 꼴을 보면 그냥 확 질러버리고 말겠습니다. 거기다 핵전력 과시라는 전후의 자랑거리도 하나 생기겠죠?
행인1 2007/07/01 00:44 # 답글
제 엉성한 글을 참고용으로 쓰시다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BigTrain 2007/07/01 18:26 # 답글
스카이호크님// 그렇게 냉정해 보였나요? ^^;핵폭탄이 쓰이지 않았다면 전쟁이 최소한 두, 세 달은 길어졌을 테고 그러면 북해도나 어쩌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의 점령 하에 놓였을 지도 모르지요. 핵폭탄 사용의 대차대조표는 아무래도 미국(과 일본)의 흑자인 것 같습니다.
행인1님// 뭘요 ^^;행인1님의 저 글이 커티스 르메이의 인간 됨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폭격기 매니아인 르메이... ^^;
gargoil 2008/12/23 06:49 # 삭제 답글
몇 가지 의문이 들어 질문 남깁니다. 2차대전 말기 정황상 미국이 일본을 두려워 한 건 사실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본토를 제압하기 위해 500만명의 미군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핵폭탄 투하가 결정되기 전, 이미 일본정부에서 미국에 항복의사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근데 미국은 항복의사를 무시하고 핵폭탄을 떨궜다고 합니다. 그럼 왜? 러시아사를 담당하신 교수님은 이렇게 말하시더군요. [2차대전 후, 세계에서 유이하게 유럽에서는 독일이,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분단되었다. 2차대전 말기, 소련은 가만히 있어도 항복할 독일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 10만여명의 소련군이 죽어야 했다. 아시아에서는 소련이 한국으로 진격했고, 반면에 미국은 일본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소련군의 빠른 진격에 미국은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신형폭탄의 위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만, 독일에 떨구지 않고 일본에 떨군것은 미국의 인종에 대한 편견때문이었다.] 저는 태평양전선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대전이란 공통분모에서 답을 찾아보는 것이 핵폭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참고로 본 내용은 제가 수업때 들은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야채 2008/12/23 10:58 # 삭제
지나가던 사람입니다만, 조금 끼어들겠습니다. 2차 대전 말기의 독일이 과연 '가만있어도 항복'했을 것이라는 말씀 역시도 전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만, 일단 그 문제는 젖혀두기로 하고...일본은 항복의사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포츠담선언을 거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내부적으로 이루어진 회의에서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기로 했다고 하지만, 포츠담선언을 거부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수상이 내용을 뒤집어서 "우리는 포츠담선언을 묵살하겠다"고 발표해 버린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는 '묵살'이 'ignore'가 아니라 단순히 'no comment'의 의미였는데, 일본에서의 한자어의 쓰임을 잘 이해하지 못한 미국측에서 ignore로 잘못 해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이 역시 변명에 불과합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내부의 언론에서도 전부 ignore로 해석하고 "포츠담 선언은 웃기는 일"이라는 식의 제목을 달아서 보도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종적 편견이라는 말씀 역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8월달의 일입니다. 독일은 이미 그 석달 전인 5월 7일, 즉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항복했습니다. 따라서 인종적 편견이고 뭐고 독일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 함부르크나 드레스덴과 같은 독일의 도시들이 어느 정도의 폭격을 당했는지를 고려해 보면 일본만 인종적 편견 때문에 특별히 심한 폭격을 당했다고 볼 이유도 없습니다.
BigTrain 2008/12/23 22:38 #
일본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자료는 여러 권이 공개돼 있습니다. 도고 시게노리의 회고록도 있고, 기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들도 여러 권이 나와 있죠. 아직 저도 공부가 부족하고, 책도 제 자취방에 몇 권 없는 상태라 자세히 알려드리기 힘든데...야채님께서 지적해주셨다시피, 일본은 종전시까지 무조건항복과 체면을 살린 항복 사이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 상태였고, 이를 정리해 준 것이 핵폭탄 투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련의 만주 침공은 기획과 준비가 거의 다 끝난 상태이긴 했습니다만 이의 시행을 재촉한 것은 원폭투하였습니다. 아마 히로시마원폭 투하 후 이틀인가 뒤에 작전이 발동된 걸로 기억하는데... 소련의 만주 침공은 (교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원폭 투하 후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최대한 떡고물을 많이 차지하기 위해 시행된 게 맞죠.
그리고 인종에 대한 편견이라는 말씀은...
플루토늄 폭탄의 핵실험 테스트인 트리니티 테스트는 1945년 7월 16일 이뤄졌습니다. ( http://en.wikipedia.org/wiki/Trinity_test )
독일은 '두 달 전'인 5월 7일 항복했었구요.
독일에 떨굴 필요가 없었죠. 그 곳은 '점령지'였으니까요. 독일이 조금만 더 잘 싸워서 전쟁이 석 달, 넉 달만 지연됐으면 베를린에도 원폭기념관이 생겼을 겁니다.